72시간다리 통해 온 귀순병사 오청성 CCTV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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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시간 다리는 말 그대로 72시간 만에 건설된 다리로, 본래 이 다리가 있기 전 북한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불리는 사천교를 통해 사천강을 건너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가로질러 놓여있던 사천교는 공동경비구역(JSA) 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고 불린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러나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북한군이 유엔군을 기습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이후 사천교가 폐쇄됐습니다. 이로 인해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히게 되자 북한은 보급을 위한 새로운 다리를 구축했습니다. 이때 완성된 다리가 바로 북한 귀순 병사가 넘어온 72시간 다리입니다. 72시간 만에 지어진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진자료 구글어스 캡쳐

 

 

참고로 아래 구글어스에 캡쳐한 사진을 보면 자세하게 보이시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연결하는 두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래 노란색으로 표시된 선이 휴전선을 의미하는데 실제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왜 72시간 다리를 만들게 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에 보시는 바와같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초소가 서로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는데 특히 북한은 불법적으로 남쪽 지역에 5개의 초소를 만들어 놓고 있었고 유엔군의 초소가 북한군의 불법초소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는데 사건이 발생한 제3초소는 JSA남쪽 모퉁이에자리 잡았고,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 오는 북한 측 출입통로의 초입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초 유엔 측은 제3초소를 설치하고, 그 북쪽에 3초소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5초소를 추가로 설치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제3초소와 제5초소 사이에 미루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나 양 초소의 시야를 가리고 되어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경비병력 10명, 노무자 5명으로 구성된 유엔사 작업반이 나무 주변에 도착해서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고 몇분 후, 북한군 장교 2명과 병사 9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

 

북한군 중위인 박철은 “죽여”라고 소리치면서 보니파스 대위를 때리자,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보니파스 대위를 쓰러뜨렸으며, 그 중 몇 명이 주위에 있던 도끼로 보니파스의 머리를 가격하고 또한 함께 있던 베렛(Mark T. Barrett) 중위도 공격함  4분간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 측 경비대는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고. 결국 미군 장교 2명은 모두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은 뒤 후송 중에 사망했고,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부상당했다.북한군의 공격으로 유엔사 제3초소가 완전히 부서졌고, 현장에 있던 유엔사 트럭 3대도 돌에 맞아 유리창이 모두 부서지는 등 손상을 입었다.

 

 

 

이후 양측의 긴박한 상태가운데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은 보복작전 개념으로 미루나무 절단 작전인 ‘폴 버년(Paul Bunyan)작전’을 8월 21일 실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폴 버년작전은 미 2사단 병력과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시작되었으며, 8월 21일 오전 6시 4분경 이들 특수임무부대가 트럭을 타고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면서 작전은 시작되었고, 7시 40분경 공병들에 의해 미루나무가 절단되었으며, 8시 30분경 이 작전에 투입된 모든 병력이 철수함으로써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유유히 초소를 지나 72시간 다리로 들어서는 귀순병사가 탄 지프차량 

 

 

유엔군사령부가 판문점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귀순한 오청성의 CCTV화면을 공개한 것을 보면 귀순병사오청성은 짚차를 이용해 군사분계선을 넘을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차량의 바퀴가 진흙에 빠지게 되면서 차량에 문제가 생기면서 차량을 버리고 맨몸으로 군사분계선을 넘고 우리측으로 도망을 치면서 북한군 3명이 쏜 총탄의 부상을 입게 되는데요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짚차를 이용해 공동경비구역인 판문점까지 누구의 제지도 없이 왔다는것은 그 누구도 이 사건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언론에서도 알려다시피 이 근처에서 근무하는 북한군은 일반 병사와는 다른 인재이기 때문에 충성심이 높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러다보니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귀순병사인 오청성씨도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서 떨리지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귀순 작전을 성공할 확신은 없었겠지만 자유를 향한 그의 진심은 결국 그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 총상으로 인해 중환자실에 있지만 곧 일반병실로 옮길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그 치료를 한 이국종 교수님의 의사 본연의 사명 및 책임은 이성적인 분들이라면 분명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생명존중을 위한 국가 시스템 정비가 잘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최근에 본 청년경찰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다시금 귀순병사의 건강을 기원하며 응급구조 중증외상 시스템의 정비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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